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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미 바이 유어 네임, 이뤄지지 못할 사랑의 아픔

by morl 2022. 2. 21.

"콜미 바이 유어 네임" 포스터

이뤄지지 못할 사랑의 아픔

  이 영화의 배경은 1983년의 이탈리아이다. 주인공인 엘리오는 17살의 청년으로, 한창 사랑에 눈뜰 시기이다. 이런 그에게도 간지러운 첫 경험이 찾아온다. 오랫동안 함께 보냈던 동네 친구인 마르치아는 서로를 잘 아는 사이에서 오는 편안함도 주었지만, 한참 혈기 왕성할 나이의 청소년들이 갖는 첫 육체적인 관계는 분명 또 다른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먼 지역에서 엘리오의 집으로 엘리오 아버지의 조수 올리버가 방문하게 된다. 올리버는 여름 동안 엘리오의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고, 엘리오는 그에게 마르치아에게서 느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올리버는 처음엔 엘리오의 마음이 단순한 풋사랑에 불과할까 봐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지만, 그 관심이 진심임을 깨달은 이후에는 자신의 마음도 아낌없이 표현한다. 아직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이 자유롭지 못했던 때이고, 여름이 지나면 다시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할 올리버였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마음껏 함께 하는 마지막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이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진 사랑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끝엔 슬픔과 아픔이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어쩌면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이 더 큰 아픔을 안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끝을 알고 시작하는 사랑은 처음엔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부터 어렵다. 그리고 커져가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부정하거나, 억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마음이 더 크게 불어나곤 한다. 역시 우리의 마음은 청개구리와도 같다. 우리 마음은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가지 말라는 방향으로 움직이곤 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노래 가사도 있긴 하지만, 아픔이 있어야 더욱 사랑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끝이 정해진 사랑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 뿐이다. 하나는 그게 비록 너무 짧은 시간이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있는 만큼 표현하는 꿈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이를 추억하는 하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애써 마음을 숨기고 더 이상 마음을 키워나가지 않는 것이다. 두 선택 모두 장단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 추억은 남지만 쓰디쓴 아픔이 함께 온다. 후자의 경우 아픔은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지만 그만한 아쉬움이 따라온다. 둘 중에 어떤 선택을 할지는 같은 사람이더라도 그 시기와, 사랑의 크기가 얼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경우는 엘리오에게 첫 사랑이었고, 그만큼 주체가 안되는 크기였기에 전자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단순한 첫사랑이었어도 그의 힘에 부칠텐데, 새드엔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경우 그 고통은 꽤나 크고, 그 여파도 아주 오래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길을 걷고만 싶게 만드는게 사랑이라는 점에서, 역시나 사랑의 힘이란 위대한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엔딩, 서로의 이름을 바꾸어 상대를 부르는 것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은 영화의 배경이 너무 아름다웠고,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을 아름답게 그렸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는 있겠으나 사실 영화의 전반적인 전개에서는 크게 감동을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엔딩 장면 하나만으로도 나에게 굉장한 임팩트를 준 영화였다. 엘리오에게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올리버의 마지막 전화, 수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마음과, 서로를 서로의 이름으로 반복해서 부르는 대화, 그리고 전화 이후에 벽난로를 가만히 쳐다보며 울먹이는 엘리오의 표정은 이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단숨에 요약해서 보여주는 엔딩이었다. 그리고 이 엔딩을 통해 나는 티모시 샬라메라는 신예 배우의 놀라운 연기력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은 전반적인 내용 측면에서는 만족하지 못했더라도, 분명 그 떨림이 전달되는 영화였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들은 왜 서로의 이름을 바꿔서 불렀을까?" 영화를 보는 도중에도, 그리고 보고 나서도 질문을 던져봤지만 해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오늘 문득 이 글을 쓰면서 상상을 해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주는 모습을 말이다. 그러자 그 이유가 자연스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게 비록 원작자의 의도와 동일한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내가 그와 동일시 되는 느낌을 느꼈다. 즉, 나와 그가 연결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를 그에게 고스란히 내어주었다는 느낌 또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생각에까지 도달하고 나니, 이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더 와닿았고 덕분에 이 영화가 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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